장편으로 썼던 글을 예시로 가져온 거라 좀 짧게 끊었습니다.
문체 확인용으로 봐주세요. :D
그날은 꼭 그랬다. 흐린 하늘, 눅눅한 공기, 그리고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비구름과 같았던 네 얼굴. 어느 하나도 여름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는 그런 하루였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거리던 너와 눈이 시리도록 불어오는 바람, 그 어느 것이 내 마음을 흔든지 아직도 기억하지 못한다.
'밤까지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강한 소나기가 내리는 곳도 있겠습니다. 시간당 30mm 이상….'
"다녀오겠습니다."
"비도 와서 오늘은 학원 쉰다며?"
"친구…, 친구가 불러서요. 학교 숙제 빌려 준다고 했거든요."
늦은 시간에 친구를 오라가라 한다며 엄마는 화를 내시다 얼른 다녀오라며 손짓하셨다. 곧 싱크대 호스에서 물이 세차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고, 문을 열고 나온 바깥 역시 같은 소리가 들렸다. 한숨과 함께 우산을 집어 들고 겉옷의 지퍼를 목까지 채워 올렸다. 비바람이 점점 거세져서 방금까지 습기 하나 없던 옷이 금방 눅눅해졌다. 걸으면 걸을수록 몸에 붙는 감촉에 절로 인상이 써졌지만 내색없이 걸었다. 걷고 또 걸어서 익숙한 건물의 문을 열어 젖혔다. 성큼성큼 계단을 오르면서 단정한 검은 머리카락을 떠올렸고, 동시에 벅차오르는 호흡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떨어지는 물기에 오만 감정이 함께 후두둑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이따 할말 있으니까, 너 수업 끝나고 만나자. 7시에 끝나지?'
'할말이요? 그냥 지금 해요.'
'아니, 지금은 좀…. 3층으로 갈게. 엇갈리면 안 되니까 꼭 3층! 6시, 3층이야, 알았지?'
밥을 한 술 뜨던 나와 내 친구들을 살피던 형은 팔랑거리며 친구들을 따라나갔다. 친구들은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같은 학원 형이냐 물었고,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수저만 바삐 움직였다. 곧이어 들린 천둥 소리에 온갖 소리가 난무하는 급식실을 빠져나오며 주머니에 챙긴 요구르트를 꾹 쥐었다. 땀인지 물인지 모를 것이 손바닥에 배었다.
그게 열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나는 처음으로 학원을 나가지 않았다. 관장님께는 조별 숙제 조장이 안 모이면 선생님께 이르는 아이라고 둘러댔고, 집에는 비가 와서 저번에 다친 허리가 아프다고 둘러댔다. 그리고 집에도, 학원에도 가지 않은 나는 친구들과 피시방에 갔다. 세 시 반, 온갖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욕설을 뱉었고, 나 역시 다를 거 하나 없었다. 배가 고픈 줄 몰랐다면 거짓말이지만 약속을 잊어먹으려고 애를 써가며 게임에 집중했다. 친구가 저녁 과외 시간이라며 그만 가자고 할 때가 8시. 약속 시간이 이미 한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그 상태에서 바로 학원에 가도 늦지 않았겠지만, 나는 애써 형과의 약속을 무시한 채 집으로 향했다. 혼자 잡은 것도 약속이라고 할 수 있던가. 제 마음 편하자고 그렇게 둘러 생각했다.
씻고 나왔더니 비는 더 거세졌다. 거실에서 혼자 떠드는 티비에서는 호우주의보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덩달아 내 심장은 바닥으로 추락했다.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그 미련한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분명 우산도 안 들고 갔을 텐데. 젖은 머리를 털다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번호도 아는데 아직까지 연락을 안 하는 건, 진짜 미련한 짓이었다. 아니, 그 사람, 너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형? …뭐 해."
" … …."
"야, B."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둥글고 검은 머리통이 들썩거리다 자리에서 쭈뼛거리며 일어섰다. 두 시간을 저렇게 앉아서 기다렸나. 미련하게 왜 아직도 기다리고 있냐고 몰아붙이는 말에도 그저 입만 삐죽거린다. 형, 바보죠. 그 말에 아까보다 서럽게 얼굴 표정이 바뀐다. 금방이라도 와르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에 입을 다물고 B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뒤에서 A야, 하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계단을 내려가며 그새 고인 빗물과 함께 떨어진 감정들을 애써 밟으며 내려갔다. 시린 손이 몹쓸 짓을 한 것만 같아 울컥해 1층에 서서 제 겉옷을 건네주고 꼬물거리며 입는 것을 지켜보다 목 끝까지 지퍼를 올려준 후에야 다시 길을 걸었다. 여전히 쏟아지는 비 아래 우산 하나는 너무 비좁았지만 괜찮았다.
무거운 눈꺼풀을 꾹 감았다 뜬 R이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청취율이 갈수록 떨어지는 탓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최근에는 시청자 게시판에 올라오는 사연마저 말썽이었다. 비슷한 스토리만 수두룩한 것은 그렇다 쳐도, 광고글이 하나둘씩 올라오기 시작하더니 한 페이지를 점령하고 마는 일이 벌어졌다. 가장 먼저 발견한 막내 작가가 급하게 지웠지만 국장님의 호출은 피할 수 없었다.
청취율이 개판이니 불려다니는 것도 당연하지.
구내 식당만 들어서도 어깨를 두드려주며 개편이 코앞이니 조금만 더 힘내자는 소리만 수없이 들었던 것 같다. 들어가자마자 호통이 아닌 자상한 미소로 시작한 이야기는 R의 성격이 물러터져서 큰일이라는 말로 끝을 맺었다.
물러터진 건 맞지만 그게 청취율이랑 무슨 상관이람.
속으로 불만을 삼키던 R에게 국장이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기운이라도 낼 겸 회식 좀 하라는 말과 함께. R은 이게 왠 떡이냐, 싶었지만 세상에 쉽고 좋은 일은 결코 혼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개편 때... 새 프로그램 짜자고, R 피디."
국장이 천천히 덧붙인 말에 카드를 받아들기 위해 손을 내민 R이 굳은 채 눈만 깜빡거렸다. 천천히 깜빡이는 눈이 국장의 표정을 읽으려 애를 썼지만, 그럴 필요도 없었다. 국장은 너무나도 단호하지만 인자한 얼굴로 웃었다.
새 프로그램, 새 작가, 새 피디.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고 입술에 힘을 꾹 쥔 종현이 카드를 받아들고 고개를 크게 숙였다. 그럼 그렇지. 애써 웃음을 지은 채 국장실에서 나온 R이 마른 세수를 하며 무거워진 걸음을 옮겼다. 터벅, 터벅. 복도를 울리는 구두 소리에 심장은 더 아래로 울리는 것만 같았다.
- Title -
조연출과 마주보고 앉은 R은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아니, 이미 다들 아는 분위기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들 한계치에 도달했는지 정신없이 꼬부라진 발음으로 국장 머리가 대머리라니, 프로그램은 좋은데 시간대가 꽝이라느니, 술을 먹고 죽겠다는 소리들을 반복했다.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탓에 두 잔만 비운 채 고기를 먹던 R이 그 말에 목이 턱 막히는 기분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것도 다 뜻이 있는 일은 개뿔. 휘청거리던 메인 작가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엎어졌다. 그에 화들짝 놀란 R이 실수로 제 잔을 툭 밀쳤다. 다행히 비어있던 잔은 맑은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서 좌우로 구르다 멈췄다.
"개편 때, 가망성 없겠죠, 저희."
"그런 말 말아요, O 피디님...."
조연출이 어색하게 웃으며 막내 작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엉엉 울던 막내 작가는 크게 호흡하더니 코를 훌쩍이며 조연출의 빈 잔에 술을 넘치게 따랐다. 가망성, 없죠. 속으로 말을 삼킨 R이 하핫, 하고 웃으며 사이다를 급하게 채워 잔을 들었다. 짠 해요, 짠. 그 말에 엎어져있던 메인 작가도 몸을 일으켜 술잔을 쥐었다.
* * *
먼저 계산을 하고 나온 R은 하나둘 택시를 잡아타는 사람들의 택시 번호를 일일이 사진으로 찍어 단체대화방에 올렸다. 이건 누가 탄 택시, 저건 누구랑 누가 탄 택시. 이렇게 보낸 사진이 대화방을 가득 채웠다. 한참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 대화방을 보던 R이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생각 정리라도 할 겸, 조금 걷다 보니 방송국 앞에 도착한 R은 건물을 느릿한 눈길로 쓸었다. 얼마나 고대하던 일인데, 그걸 이리도 쉽게 정리할 수가 있지. 몸을 돌려 집으로 가려던 R이 아직 닫히지 않은 커피숍을 발견하고 혀를 찼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네. 안타까운 마음이 동해서 그런 건지 어느새 R의 발은 커피숍을 향하고 있었다.
"어서오세요."
기차가 출발한다. 시끄러운 경적 소리에 어울리지 않는 한껏 비장한 얼굴의 사내들이 가득찬 열차 안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 사이 앳된 얼굴의 소년이 눈치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자 옆좌석에 앉은 남자가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를 비켜줬다. 소년은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창가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멀어지는 역을 금세 뒤덮고 빠르게 내달리는 나무들이 소년의 두 눈에 가득 찼다.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이 목 끝에 걸려 뱉어지지 않았다.
책장을 넘겨 읽던 A의 손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베였다. 옆자리에 앉아있던 친구들이 부산스럽게 휴지를 건네고 A를 안쓰럽게 여겼으나 A는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다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비리다. 터널만 지나면 이제 곧 목적지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터널로 빠르게 진입하는 기차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어둡단 걸 인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칸이 흔들렸다. 어, 어! 하는 소리와 함께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리고 빛이 조금씩 들어오던 찰나.
끼익!
투두둑, 두둑.
굉음을 내며 기차가 멈춰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무를 들이박고 멈춰섰다. 크게 다치지 않았는지 사람들은 곡소리를 내며 일어섰다. 다행히도 깨지지 않은 유리 너머로 무슨 일이 벌어졌나 확인하던 우리는 탄성인지 뭔지 모를 것을 내뱉고 창에 붙었다. 우리의 눈에 펼쳐진 것은 5월의 푸름은 전혀 남아있지 않고, 주변이 모두 눈으로 덮인 설원이었다. 다들 믿기지 않는다고 한소리씩 하다가 문득 기관사는 무엇을 하는가. 그런 생각이 들어 비상 전화기를 들어봤다가 수신이 잡히지 않자 성급하게 문을 열어젖혔다.
…인, 간?
우리를 보더니 놀란 눈으로 달아나는 것은 반은 인간이지만 반은 사슴의 몸을 한 괴물이었다. 문을 제일 먼저 열었던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렇다고 뭐 특별한 일이 벌어진 건 아니었지만 모두 한껏 주변을 경계했다. 저기요. 문 좀 닫죠. 누군가 그렇게 말을 하자 남자가 기어올라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밖에서는 아까 그 이상한 괴물과 여러 동물들이 조금씩 몰려들기 시작했다.
ㅡ 우리 이대로 괜찮을까요?
ㅡ 안 괜찮으면요.
ㅡ 핸드폰이 안 터져서 119도 못 부르는데 무슨 수가 있어요?
ㅡ 나가보기라도 해야죠.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을 수도 없고.
날이 선 대화가 오가다 '나가자'는 말에 갑자기 정적이 찾아왔다. 누군가 코웃음을 친 것 같기도 하지만 정말 조용히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리고 밤이 찾아왔다. 추위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통성명을 하고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기분 나쁜 소리에 귀를 틀어막았다. 그러자 누군가 고민도 없이 일어서서 밖을 살펴봤다. 낮에 문 좀 닫아달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그는 무언가 기차 외관을 긁고 있다고 이야기 하더니 급하게 몸을 숙였다.
ㅡ 이거 다 개꿈인가. 개꿈이어야 하는데.
남자가 중얼거리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누구도 말릴 새 없이 벌어진 일이라 그저 닫히는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그리고 남자는 다음 날 아침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 중 몇 명의 사람이 나가서 주변을 돌아보고 오는 김에 남자도 찾아오겠다, 말하고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뛰어내린 사람들의 발자국이 움푹 패였다. 눈이 내리지 않아서 이 발자국이 남으면 우리에게 좋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낮이 되어 돌아온 것은 사람들이 아니라 어제의 그 괴물이었다.
"저, 저기요! 인간? 인간 맞죠?"
우리는 모두 괴물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누군가는 비명을 질렀지만 누군가는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찍었다. 참 태연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괴물이 우리에게 팔을 흔들며 다가왔다. 고작 창문 하나를 두고 서서 괴물을 보는 것이 안전하다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를 해칠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거기 계속 있으면 위험해요. 붉은 성의 병사들이 당신들을 잡아가려고 오고 있거든요. 같이 가지 않을래요?"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던 괴물이 한참동안 서서 팔을 휘적거렸다. 본인이 안전한 걸 보여주려는 것 같았다. 고민 끝에 누군가 밖으로 나섰다. 역시나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두 안심하고 하나 둘 밖으로 내려갔고 마지막으로 내려오던 A를 포함한 3명 정도가 발을 땅에 딛는 순간. 컹컹, 거리는 소리와 함께 사냥개 한 마리가 어디선가 뛰쳐나왔다.
ㅡ 사, 사냥개?
누군가 입 밖으로 생각을 뱉자 괴물이 짧게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왼쪽 길로 떠밀었다. 그리고 생물의 이름을 정정했다. 사냥개가 아니라 늑대, 라고. A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은 그대로 다시 기차 안으로 기어들어갔고 우리는 괴물을 따라 뛰었다. 아니, 근데 이 괴물을 믿어도 되는 게 맞나. 그런 생각이 짧게 스쳤지만 우리는 이미 괴물의 집 안으로 들어선 이후였다.
괴물은 한숨 돌리자마자 본인의 소개를 했다. 본인은 넥터고, 이 일대를 지키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본인 스스로 사람이라고 소개했지만 모두 의아한 얼굴을 하고 그를 봤다. 그는 아까 본 늑대들은 붉은 성의 하수인이며 목을 물어 뜯어 숨을 끊고, 숨이 조금이라도 붙어있는 생명체들은 붉은 성으로 데려간다고 얘기했다. 우리는 문득 기차에 남겨진 A와 몇 명, 새벽에 사라진 남자, 그를 찾아 떠난 사람들이 생각났다. 괜찮을까. 괜찮지 않아도 우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가려면 이 앞의 언덕과 정원을 지나 숨의 대지로 가야해요."
어쩌다 오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아니라고 넥터는 걱정스러운 낯으로 한참 쫑알거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코코아와 담요를 주고 벽난로에 불을 붙여 우리를 친절히 보살펴줬다. 그리고 나갈 수 있도록 어떻게든 도와주겠다고는 했는데, 우리는 왜? 라는 물음을 떠올렸다가 낯설고 두려운 곳에서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가는 길에 A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기도하는 밤이 지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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